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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자본가의 탄생과 대항해시대, 그리고 야코프 푸거 본문

Review(감상)

(책)자본가의 탄생과 대항해시대, 그리고 야코프 푸거

WBDJOON 2019. 3. 18. 17:59

도스 시절 일본 KOEI 사가 발매한 '대항해시대2'라는 게임은 지금도 매니아가 있을 정도로 호평이 자자한 PC게임이다. 16세기 대항해시대가 열렸던 역사를 배경으로 유럽의 항해가들이 배를 몰고 미지의 지구를 돌며 무역과 탐험을 하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 이 게임은 1522년 9월부터 시작하도록 설정되어 있다. 


어린 시절엔 왜 게임의 시작점이 1522년 9월인지 의문을 품지도 않았고, 당연히 그 이유도 몰랐다. 그러다 책 '자본가의 탄생'을 읽으며 알게 됐다. 인류 최초로 지구를 한 바퀴 도는데 성공한 마젤란 함대가 스페인으로 돌아온 때가 바로 1522년 9월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걸 인류가 처음으로, 몸으로 직접 입증한 시점이다. 

참고로 같은 해 종교개혁의 불을 지핀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을 처음 발간했고, 3년 후 이 책의 주인공인 독일 대부호 야코프 푸거는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종교 갈등이 격화하던 격동의 유럽 속에서 최초의 자본가라는 발자취를 남긴 채 타계했다. 


책 '자본가의 탄생'은 월스트리트저널 기자 출신인 그레그 스타인메츠가 영어로 된 야코프 푸거의 일대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기자적 호기심과 소명의식으로 쓴 책이다. 같은 직업을 가진 덕분인지 정보의 핵심을 취하고, 잔가지는 버리고, 간결하고 쉬운 문장을 적용하는 저널리즘 글쓰기 방식을 그대로 적용한 이 책이 술술 읽혔다. 아울러 이런 저널리즘 작법의 묘미를 그대로 살려낸 번역가 노승영씨의 실력에 존경의 마음이 들었다. 


이 책은 얼핏 보면 한 부호가 많은 돈을 벌어들인 이야기로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야코프 푸거라는 부호가 당시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로마 기독교가 부패하며 중세적 모순이 극에 달하던 시대 상황에 속에서 거대 자본가가 역사적 흐름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미쳤는 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이 중 가장 눈길을 끌었던 건 당시
포르투갈이 인도 후추무역 신항로를 개척하고 후추 무역을 했을 때 푸거가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점이었다. 푸거가 구리 광산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던 1505년, 포르투갈의 제독 프란시스쿠 알메이다는 푸거를 비롯해 독일 상인들의 투자를 받아 희망봉을 돌아 인도와 후추 무역을 성사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 결과 단 수년 만에 베네치아의 후추 독점은 깨졌다. 베네치아는 1514년 포르투갈로 후추를 수입하는 위치로 전락했다. 이때부터 무역업자들은 완전히 몰락하고 유리그릇, 비단, 양모를 생산하는 제조업으로 도시의 산업정책의 방향을 바꾼다. 


하지만 이는 베네치아이의 옛 영광을 유지시켜주지 못했다. 리스본이 후추 무역의 최고 중심에 떠올랐고, 야코프 푸거는 이를 독일과 동유럽에 가져다 파는 후추 중개상으로 엄청난 수익을 거두었다. 17세기 네덜란드가 동남아에서 후추를 들여오기 전까지 포르투갈의 대항해시대 전성기가 이어졌다. 당시 에스파냐는 인도보다 아메리카 대륙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구리와 은광을 갖고 있던 푸거는 후추 무역의 최대 수혜자였다. 인도가 후추를 파는 대가로 금, 은, 구리 등 금속을 원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은 푸거의 금속과 후추를 맞바꿨다. 푸거는 이 후추를 북유럽과 유럽 내륙 지역에 중개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최근 네덜란드 앞 북해에서 발견된 16세기 난파선에서 푸거 가문의 동판이 대거 발견된 기사에 흥미로운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영감을 줬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11/2019041100204.html


이 외에도 푸거는 로마 기독교 세계관에 갇혀있던 유럽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는 그가 역사적 변동을 가져오겠다는 의지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순수하게 자본가다운 면모로 자신의 이익을 철저히 추구했을 따름이다. 이익을 쫓는그의 자본가적 행태가 역사적 변동에 큰 영향을 줬을 따름이다.  


*고리대금의 합법화

푸거는 교황 레오 10세를 통해 고리대금에 대한 종교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 스스로 고리대금 업자였기 때문이다. 제5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발표된 교황의 칙령으로 노동, 비용, 위험이 없이 그저 이자만 부과하는 고리대금이 허용됐다. 물론 이후에도 고리대금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졌지만, 종교적으로 금기시되던 대부업과 금융업이 합법적인 사업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였던 건 분명하다.

이 당시 푸거의 후원으로 고리대금의 합법화를 주장한 사상 요하네스 에크는 이후 종교개혁을 촉발시킨 루터를 고발해 교황청이 파문하는 데에도 앞장선 인물로 역사에 남아있다. 푸거도 루터를 싫어했고 교황 시스템을 유지하고 부패한 교황과 공생하며 그와의 사업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탄생

헝가리 구리 광산에서 막대한 이득을 낸 푸거는 1514년부터 오스만튀르크의 헝가리 침입이 잦아지고 농민들의 민란과 귀족 간의 파벌 싸움으로 정세가 불안정해지자 막시밀리안 1세의 합스부르크 왕가(신성로마제국)와 헝가리의 결혼동맹을 막시밀리안 1세에게 강력하게 종용했다. 최대 채권자이자 가장 큰 후원자의 뜻을 수용한 막시밀리안 1세는 폴란드의 지그스문트와 헝가리 국왕을 빈에서 불러모아 1515년 제 1차 빈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막시밀리안 1세와 헝가리 왕실은 결혼을 통해 합스부르크가 헝가리 왕국의 주권을 갖게 되고, 지그스문트는 이를 승인하는 대가로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프로이센을 넘겨받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합스부르크 왕가와 헝가리 왕가의 결혼을 치룰 당시 그 비용을 푸거가 모두 지원할 정도로 푸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종교개혁의 빌미가 된 푸거의 대부업


신성로마제국의 선거후(황제 선거에 투표권을 갖고 있는 제후)인 마인츠 주교 자리를 차지하려는 알브레히트에게 푸거는 막대한 자금을 빌려줬다. 덕분에 알브레히트는 교황 레오 10세에게 마인츠 주교직을 매수할 수 있었다. 푸거에게 돈을 상환해야 하는 알브레히트는 이 돈을 갚을 수단으로 면죄부 판매라는 아이디어를 처음 착안했고, 면죄부 수익을 푸거와 교황이 반반씩 나누기로 합의하는 데 이른다. 잘 아시다시피 이렇게 팔리기 시작한 면죄부를 본 마르틴 루터는 격분했고, 95개조 반박문을 공표함으로써 종교개혁이 불씨가 피어올랐다. 


*16세기 스페인 내전(코무네로스의 반란)

막시밀리안 1세가 죽고 난 후 신성로마제국의 새로운 황제를 뽑는 선거에서 푸거는 엄청난 대출로 막시밀리안의 아들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 제위에 오르도록 후원했다. 합스부르크가 왕들에게 막대한 통치자금을 대출하고, 그 대가로 광산운영권을 독점하거나 고율의 이자를 받는 것이 푸거의 주요한 사업방식이었다.

 

하지만 이 대출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를 받너 스페인에서 내전이 일어나는 계기가 됐다. 카를 5세가 푸거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스페인 내 카스티야 의회에서 세금 인상을 관철했고, 이로 인해 카스티야 지역에서 세금에 저항하는 민란이 발생했다. 코무네로스의 반란이다. 

 

이 민란을 진압하며 카를 5세는 세금 징수를 하지 않기로 하면서 푸거의 빚을 상환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무담보로 대출을 했던 푸거는 이 떄 궁지에 몰렸지만, 이후 파비아 전투에서 카를 5세에게 추가로 대출을 해주고 스페인의 수은 광산을 차지하면서 다시 숨통을 트이게 된다.   


그 외 푸거에 얽힌 흥미로운 사실들. 


*당시 최대 규모의 빈민주택자선사업이었던 '푸거라이'

-500여명이 살 수 있는 대형주택단지를 짓고 '일을 하는' 근로자에게 '1년에 1플로린'을 받고 거주지를 제공하는 푸거라이 사업을 벌인 게 바로 야코프 푸거.  푸거라이는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훗날 모차르트의 증조부 프란츠도 푸거라이에 거주하기도. 


-푸거의 18대 후손에 이른 오늘날 푸거라이는 고령의 카톨릭 신자들이 모여 1년에 85유로를 내고 거주하는 주택단지로 변모했다. 여기에 들어가는 유지 비용은 야코프가 막시밀리안에게서 사들인 토지에서 벌목한 목재를 판 돈으로 충당하고 있다고. 


*1525년 독일 농민 전쟁


-지독한 가톨릭이자 보수주의자였던 푸거는 10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이 대규모 전쟁에서 농민 반란을 진압하는 데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당시 푸거는 루터가 농민전쟁을 선동했다는 편지를 브란덴부르크의 게오르크 공작에게 작성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당시 루터도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독일 농민들의 반란에 등을 돌렸다고.


-전쟁이 종식된 그 해 12월 30일 야코프 푸거는 조카 안톤 푸거에게 사업을 넘기고 사망. 


*푸거 사후

-33년간 야코프 푸거의 연평균 수익률은 12%. 


-후계자 안톤 푸거는 신대륙 발견으로 인한 유럽 경제의 중흥과 스페인의 몰락을 모두 경험


-카를 5세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합스부르크 왕가를, 직계 장자인 펠리페 2세에게 스페인과 이탈리아 남부, 네덜란드 식민지 등을 나누어주는 식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을 분할. 이후 펠리페 2세는 푸거 가문에 대해 역사 최초로 채무불이행을 선언하면서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