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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이야기

전 월스트리트저널(WSJ) 특파원의 베네수엘라 체험기 -1-

WBDJOON 2020. 2. 14. 10:22


프롤로그: 세계에서 가장 미친 상태의 경제 <1>

 내가 처음 베네수엘라를 방문했던 2004년 6월, 당시 나는 내 혁대에 9000달러를 몰래 숨겨 베네수엘라에 입국했다. 꽤 위험한 일이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당시 나는 막 '다우 존스 뉴스와이어'와 '월스트리트저널'의 카라카스 주재 특파원으로 발령받았는데, 여러 동료들은 나에게 "베네수엘라의 엄격한 외환관리 규정 탓에 베네수엘라에 합법적으로 달러를 가져가는 게 매우 어려울 거다"라고 경고했다.

 

베네수엘라 지도

 

 당시 내 급여는 미국 내 달러 계좌로 지급되었기 때문에, 나는 내 봉급으로 석유 부국 베네수엘라에서 충분히 여유롭게 지낼 수 있을 거라 확신했었다. 당시 나는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5성급 호텔에서 호화로운 삶을 즐기는 외국인들의 이야기를 꽤 많이 들었다.  최상류 계층의 이웃들이 사는 호화 아파트에서 머물고, 청소 서비스와 음식 배달 서비스를 누리며 최고급 레스토랑과 바, 클럽을 들락거리는 이야기 같은 것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해변가에 주말용 아파트를 두고 SUV를 몰고 다니면서도 충분히 저축을 했다고 나에게 말해줬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달러로 받은 봉급을 베네수엘라 화폐인 불리바르로 환전하는 게 까다로울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 베네수엘라는 달러 직거래를 하는 것은 불법이었고, 암거래만 가능했다. 베네수엘라 머무르는 외국인들은 환전을 위해 안면도 거의 없는 사람들에게 달러를 송금했다. 그들 모두 은밀하게 달러를 볼비바르로 환전해주는 익명의 인사들이었다.

 

 보통 베네수엘라에서 환전을 할 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달러 암거래상과 거래를 트거나 지역 은행에서 매우 값비싼 값에 볼리바르로 합법적으로 환전하는 것이다. 달러화를 합법적으로 거래하는 것은 곧 그 외국인이 베네수엘라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없게 된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합법적 거래가 설 자리는 없었다.

 당시 나는 달러 암거래 시장에 아무런 접점도 갖고 있지 않았다. 사실 베네수엘라 사람 중에서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달러화를 송금할 마음의 준비도 돼있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곧 직거래를 통해, 은행 거래를 통할 필요도 없이 달러화를 볼리바르 현금으로 교환하는 사람을 알게 됐다. 짐을 싸면서 나는 통상 베네수엘라 입국시 당국에 신고해서 반입할 수 있는 1만 달러 한도를 넘지 않게 달러화를 밀반입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긴장감에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지만, 입국 심사에서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베네수엘라에 과도하게 많은 달러를 반입하는 것은 단지 입국심사를 통과하는 것을 외에도 당신을 곤경에 빠트릴 여지가 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도둑들이 막 공항에 입국해 눈을 희번덕거리는 외국인들을 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공항에 주차된 포드 익스플로어 SUV 차량만 안전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일반적인 택시들을 타면 당신은 슬럼가로 끌려가 거구의 무리들에게 여행 가방과 가진 돈을 모두 빼앗길 가능성이 상존한다.

 

 다행히 나는 아무 문제 없이 입국심사를 통과했다. 곧 수도 카라카스의 해안가로 이어진 구불구불한 고속도로로 나를 데려다 줄 검은색 SUV 차량에 뛰어들었다. SUV 기사가 나에게 드문드문 말을 거는 동안 나는 달러화가 든 혁대를 시종일관 움켜쥐고 있었고, 카라카스 주변 산 중턱 높이 위치한 빈민층 거주지역의 풍경을 바라봤다. 기사가 나를 호텔에 무사히 내려주었을 때야 비로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나는 곧 달러화 같은 경화를 손에 넣길 간절히 바라는 믿을만한 베네수엘라 현지인들을 충분히 알게 됐다. 이들 대부분이 내 달러화를 불리바르화로 바꿔줄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당신이 진작에 내 해외 계좌에 달러화를 송금했으면 편리했을텐데, 굳이 진땀을 흘리며 혁대에 달러화를 숨겨왔느냐"며 나의 입국해프닝을 우스워했다.  베네수엘라에서 경제 형편이 괜찮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외 계좌를 이용한다.

 

 아무튼 혁대에 숨겨 가져온 달러들은 내가 새 아파트를 임대하고 한동안 여유롭게 생활하는 데 도움을 줬다. 당시 베네수엘라 현지 은행에는 예금으로 달러를 받는 게 금지됐다. 나는 마치 풋내기 마약거래상처럼 호텔 객실 안 서랍장을 현금으로 가득 채워두었다. 꽤나 이색적인 삶의 경험이었다. 


 당시 베네수엘라는 역사상 아주 특이한 상황을 겪고 있었다. 공수부대 출신 좌파 정치인으로서 쿠데타를 모의한 바 있으며, 수십년 간 이어진 부패를 척결하고 석유로 번 돈을 빈곤층에 재분배하겠다고 공언해 1999년 대통령에 당선된 우고 차베스가 집권하던 시기였다.

 카리스마 넘치는 그는 베네수엘라를 완전히 바꾸고 싶어했고, 이를 위해 일련의 새로운 법을 제정하고 헌법까지 개정했다. 심지어 자신의 개인적인 영웅인 남미 해방의 영웅 시몬 볼리바르를 기리기 위해 나리 이름까지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으로 바꿨다.

 당시 차베스는 누고도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로 보였다. 2002년에 일어난 쿠데타로 그는 47시간 동안 대통령직에서 추방됐으나 다시 대통령직을 되찾았고, 2달간 이어진 국가대파업에서도 권좌를 지켰다.  두 사건 모두 그의 정적들이 조직한 것이었다.

 베네수엘라 경제는 차베스가 몰아친 경제 개혁에 면역이 되어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차베스는 환율을 고정환율제로 바꾸고 달러 유입량 및 유출량을 모두 통제했다. 기본 생필품 가격을 아주 낮게 통제했고, 기업의 인력 감축을 불법으로 만들었다.

 차베스는 뚜렷한 좌파적 감수성을 갖고 있었음에도 당시 그 누구도 전 세계 석유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차베스의 정체를 정확히 포착하지 못했다. 당시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다"라는 그의 말은 유명했다. 차베스는 쿠바의 카스트로와 가까운 친구이자 동맹이었지만, 한편으로 그는 월스트리트의 금융가들에게도 "베네수엘라 정부와 함께 사업을 해보자"고 열렬히 구애했다.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는 국제 유가를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올라가길 바랬다. 이에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들을 상대로 로비를 벌여 석유 생산량을 줄이고 유가를 높게 유지하도록 해 미국의 가솔린 소비자들과 그 외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부담을 안겼다. 유가를 끌어올리는 국제적 캠폐인에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까지 동지로 끌어들였다. 그는 국내에 지출할 더 많은 돈을 원했지만, 미래를 위한 경제 계획의 세부적인 사항은 말하기를 꺼려했다. 그는 전문 관료나 경제정책에 박식한 학자가 아닌, 요령 좋은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To be continued

 

출처: 라울 가예고스 저, 'Crude Nation, How oil riches ruined Venezue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