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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현대문명의 정치시스템인 민주주의을 향한 혁명 본문
#1. 227년 전,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민주주의와 산업경제를 두 축으로 두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문명은 곧 근대문명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근현대 문명의 두 축이 서방 세계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건 250여년 전으로 볼 수 있죠.
서방세계의 민주화를 향한 혁명은 미국과 프랑스가 주도했습니다. 미국은 영국의 제국주의에 저항해 독립을 이루는 동시에 형식적 민주주의를 갖췄습니다. '18세기의 세계대전'으로 불리는 7년 전쟁으로 재정이 악화된 영국은 13개의 주로 이루어진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정치·경제적 통제를 강화했습니다. 7년 전쟁이 막을 내린 1763년 설탕법을 제정하고 1765년 인지법을 제정해 식민지에 대한 세금부담을 높였죠.
아메리카 식민지는 "대표가 없는 곳에서 과세할 수 없다"며 반발했고, 영국의 식민지 통제에 대한 분노는 1773년 보스턴 항에 있던 동인도 회사의 배에 실린 차가 바다로 던져진 보스턴 차 사건으로 폭발했습니다. 1774년 13개 식민지 대표가 모인 제1차 대륙회의가 개최되고 다음 해에 보스턴 인근 렉싱턴에서 영국군과 미국 민병대가 충돌하면서 독립전쟁이 시작됐습니다.
대륙회의는 1776년 독립을 선언했고 조지 워싱턴이 총사령관으로 각 주의 민병대를 규합해 독립 전쟁을 이끌었습니다. 워싱턴의 활약과 프랑스 등 열강들의 지지를 얻으며 미국은 승기를 잡자 영국은 1783년 파리 조약을 통해 미국의 독립을 승인했습니다.
독립 이후 아메리카 13개국은 독립국으로 오손도손 살고 싶었지만, 막대한 전쟁비용으로 각 주 정부가 극심한 재정난과 사회적 혼란을 겪었습니다. 1786년 셰이즈의 반란이 일어나자 혼란을 수습할 연방정부의 필요성을 느낀 각 주 대표들은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연방정부 구성을 위한 제헌회의를 개최했습니다. 메디슨과 해밀턴을 중심으로 한 연방주의자와 반연방주의자 간의 대립은 코네티컷 타협으로 해소되었고, 1788년 헌법이 제정되었습니다. 1789년 제정된 헌법에 따라 선거인단의 만장일치로 조지 워싱턴이 미 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에 올랐는데, 지금부터 227년 전 일입니다.
#2. 미국 독립전쟁이 프랑스 혁명을 부르다
미국을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가 독립전쟁에 참전한 것은 루이 14세부터 악화된 프랑스 정부의 재정난을 극도로 악화시켰습니다. 정부 재정의 절반 정도가 부채에 대한 이자와 상환금에 소요될 정도였죠. 구 체제(앙시앙 레짐) 하에 귀족과 성직자에 과도한 부가 집중된 불평등으로 민심의 불만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정부가 새로운 세금 징수에 나서자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에 오른 1789년 삼부회가 소집됐고,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혁명의 막이 올랐습니다. 지방에서도 자치위원회와 민병대가 조직되어 혁명을 지원했고, 국민의회는 "자유의 한계는 법으로 만 정할 수 있다"며 종교·집회·언론의 자유를 알리는 인권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1791년 헌법으로 단원 의회와 입헌군주정이 규정되었고 1792년 의회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인 오스트리아 등 절대왕정체제에 철퇴를 가하자"며 오스트리아에 선전 포고를 했습니다. 프랑스 혁명군은 유럽 각지의 절대왕정과 모두 교전상태에 들어갔으며 그 해 발미에서 프로이센을 물리쳤습니다. 1793년 마리앙투아네트의 남편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는데 지금부터 223년 전 일입니다.
#3. 15년 간 프랑스를 독재로 다스린 혁명의 수호자
구체제를 억압을 깨트리겠다는 열정, 구 체제의 억압에 대한 분노는 왕의 목을 내리치는 혁명으로 표출되었으나 혁명은 새로운 혼돈과 억압을 불렀습니다. 안으로는 물가 폭등과 극심한 경제난에 민중들의 불만이 치솟았고 밖으로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응징하지 못해 안달이었죠. 대내외적 위기를 수습하겠다는 로베스피에르 정부가 혁명재판을 통해 광기스런 공포정치를 선보이자 1794년 데르미도르파가 루이 16세와 같이 로베스피에르의 목을 단두대에서 잘랐습니다.
그 다음해 새로운 헌법을 제정되었지만 데르미도르파의 총재정부도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젊은 군인 나폴레옹의 활약이 프랑스 국민들을 위안시키는 유일한 소식이었죠. 1795년 왕당파의 폭동을 진압하며 두각을 드러낸 젊은 군인은 27세의 나이로 이탈리아 원정군의 사령관을 맡았고 1798년에는 이집트에 원정을 가 로제타 비석을 찾아내는 고고학적 성과를 내기도 했습니다. 다음 해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돌아와 쿠데타를 일으키고 통령에 취임했습니다. 삼부회 소집 후 9년 만에 프랑스 혁명은 "혁명을 수호하겠다"는 영웅의 반혁명을 통해 막을 내렸죠.
4.19 혁명 후 혼란 속에서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박정희처럼 1799년 통령이 된 나폴레옹도 독재체제를 구축했습니다. 1802년에는 통령의 임기를 종신으로 바꾸더니 1804년에는 나폴레옹 1세로 즉위했습니다. 쿠데타 이후 5년만이었죠. 황제가 된 그 해 그가 내놓은 '나폴레옹 법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큰 수정 없이 계속 시행되었습니다.
유럽대륙을 제패한 나폴레옹의 유럽 정벌은 역설적으로 유럽 각 지의 민족주의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패퇴한 나폴레옹은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했고 반혁명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했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지 15년, 황제가 된 지 10년 뒤인 1814년 혁명을 수호하겠다는 독재자는 엘바 섬으로 유배됐습니다.
유럽 열강들은 빈 회의를 통해 프랑스의 왕정복고를 결의했습니다. 루이 18세가 프랑스 왕위에 올랐고 입헌군주제 헌법이 제정됐죠. 나폴레옹은 1815년 화려한 복귀를 알렸지만 워털루 전투에 패배하며'100일 천하'라는 단어를 남겼습니다. 불과 200여년 전에도 프랑스는 안정된 민주주의를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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