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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야기)'더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에게 고한다. 본문
- 대중적 시선에서의 메타비평;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미학에 대하여-
미술은 진보하는가
현대 회화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을 뽑으라면 단연 클레멘트 그린버그다. 회화의 순수성과 진보, 그리고 그 해답으로서 추상표현주의 회화를 옹호한 그는 '아방가르드와 키치', '더 새로운 라오쿤을 향하여'라는 유명한 비평들을 통해 높은 권위와 명성을 얻었다. 덕분에 그는 1940년대 이후 현대회화의 '발전'과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의 비평을 통해 회화의 정체성에 대한 중대한 질문들이 제기 되었고, 그에 응답하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그러한 노력의 흐름들이 오늘날 현대 회화, 현대 예술의 형성해왔다고 하더라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던지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클렌멘트 그린버그의 미학은 실제로 예술을 발전시켰는가?' - 현대 회화, 예술은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추상표현주의의 대두와 그에 대한 반작용들, 그리고 이후 단토가 선언했듯 '예술이 종말된 시대‘로 접어든 것처럼 보인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그린버그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그리고 그에 대한 반작용, 새로운 예술의 시대는 정녕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아방가르드와 키치’, ‘더 새로운 라오쿤을 향하여’
그린버그의 미학이란 무엇인가? 이는 그의 가장 유명한 두 글, ‘아방가르드와 키치’, ‘더 새로운 라오쿤을 향하여’를 통해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방가르드와 키치’에서 그린버그는 아방가르드의 당위성, 그리고 당시의 사회적 흐름과 회화가 절연해야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내세웠다. 그는 대중문화라고 통칭할 수 있는 “키치”가 문화적 가치에 주목하지 않고 단지 대중적·상업적 문화 속에서 오락으로 소비되고 있으며, 자본주의와 파시즘이 대중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아방가르드 문화가 사회로부터의 철저히 분리되어 심미적 표현의 절대적 자유를 고집하고, ‘미술을 위한 미술’로 나아가야만 미술과 문화가 가진 가치를 지켜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미술을 위한 미술’은 미술만의 독자적 매체 자체에서 내용을 발견하고, 매체를 기법 상으로 어떻게 다루는 가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궁극이 바로 순수미술이며, 추상미술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더 새로운 라오쿤을 향하여’에서 그린버그는 형식주의 미술을 더 구체적으로 주장했다. 그는 글에서 회화의 순수주의를 주장한다. 즉 회화의 진보란 문학에 예속되어 매너리즘에 빠진 회화가 그 장르의 순수성을 모색해온 과정이었으며, 순수성을 찾는 시도는 회화 자체의 본질, 즉 회화의 평면성, 원색의 사용, 형태의 단순화를 통해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 그 요지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방가르드는 쿠르베와 마네로부터 회화의 평면성에 대한 주목이 시작되었으며, 그 진보의 흐름이 입체주의를 거쳐 20세기 초반의 추상미술로 이어진다고 그는 주장했다.
순수함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
예술의 순수성, 즉 장르의 순수성은 중요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많은 예술가들은 긍정적인 답변을 할 것이다. 장르의 순수성은 곧 장르의 정체성과 연결되며, 그것은 곧 예술가에게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응답이며 '내가 어떤 사람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회화의 순수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그린버그의 시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그린버그의 지적대로 근대 회화는 어떤 의미로든 매너리즘에 빠져있었고, 특히 사진이 등장하면서 회화의 정체성과 순수성은 심각한 도전에 놓여있었다. 더불어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강력한 대립 하에서 회화는 '키치적'으로 상품화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일이 만연하고 있었다. 그린버그의 순수주의는 이러한 환경에 대한 반발이자, 총체적인 비판이고 대안이었다. 즉, 회화만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그것을 통해 회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미'를 추구하고자 했으며 그것이 그의 순수주의의 궁극적인 목표였을 것이다. 그는 회화의 총체적 위기를 극복할 대안으로 순수주의를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그 해답으로서 제시한 추상표현주의는 여러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적으로 그의 순수주의는 회화의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회화가 예술의 일종이라고 한다면, 그 종착점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그는 회화의 순수성이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응답하였으나, 그 순수성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는 가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저 회회의 순수성이 정당하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순수한 것이 왜 아름다운 것인가, 혹은 순수한 것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는 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저 순수한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할 뿐이다.
나아가 그는 회화의 순수성을 회화의 진보로 규정하고, 거기에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회화의 단선적 진보라는 그의 관념은 대중문화(키치)와 엘리트 문화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권위적인 미적 태도와 맞물려 하나의 교조주의로 나타났다. 그린버그의 순수주의는 이데올로기라는 교조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한 것이었으나, 오히려 그는 순수성에 함몰되어 예술의 사회성과 대중성에 대해서도 극단적인 반감을 드러냈다. 이것이 이후 오히려 미적 다양성을 포용하지 못하고 새로운 교조주의로 나타나게 된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회화는, 아무것도 그리지 않게 되었다.”
그린버그의 순수주의가 낳은 또 다른 결과는 회화에서 '재현'이 크게 위축되었다는 점이다. 회화의 탈문학화를 주창하면서 그린버그는 재현이 회화가 환영을 통해 문학적 효과를 추구하게 되는 ‘주범’으로 규정했다. 이는 그의 교조적 미학, 그리고 다다이즘의 주장들과 맞물리면서 회화의 다양성을 급속히 위축되는 결과를 낳았다. 형식예술, 추상회화가 '올바른 것'으로 규정되면서 미술가들은 새로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 - ‘탈문학화’와 ‘탈재현’이 회화의 진보라는 독트린 하에서, 미술가들은 형식만을 그릴 수밖에 없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회화는 '아름다움' 아니라 '순수성'과 '새로움'만을 추구하게 되었다. 결국에 회화는, 아무것도 그리지 않게 된 것이다. 형식미학에 낯선 대중에게는, 실제로 그러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회화의 독자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형식만이 드러난 회화는 작품 스스로 대중에게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미술관의 관람객들은 작가의 해석이나 주장 혹은 비평가의 해설 없이는 회화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회화는 언어와 미학에 종속되었다. 단토는 앤디 워홀이 가져다 논 브릴로 박스를 보면서 '예술 그 자체가 미술이 되어버린' 다양성의 시대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으나, 사실 그 브릴로 박스야말로 예술이 언어, 철학, 미학에 종속된 시대를 알리는 상징이 아닐까. 미니멀 아트와 포스트모던들은 그린버그의 교조주의와 대립각을 세웠지만, 사실 그들 역시도 추상표현주의 회화들과 같이 언어, 철학, 미학에 종속되는 과정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아름다움으로 돌아가자
즉, 그린버그가 추구했던 추상표현주의, 그리고 그에 대한 강력한 반작용들 모두 그린버그가 주장한 단선적 진보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린버그의 회화적 진보라는 관념은 현대예술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양자 모두 ‘새로움’을 모색하고 ‘더 나은 예술’을 모색했으며 결과적으로 회화 혹은 예술을 도구 삼아 그들의 철학을 설파하는데 핏대를 세웠을 뿐이다. 회화, 예술은 더 이상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표현하지 않는다. 예술은 '언어의 시대' 이고, '철학과 미학의 시대'로 불러야 하는 것일까.
지금이야말로 회화와 예술은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 말이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표현하여야 한다. 그리고 예술이 도구가 아니라, 예술 그 자체로서 아름다움을 표현해야한다. 그것이 진정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예술을 도구삼아 예술의 다양성, 혹은 예술의 범주를 파괴하려는 시도는 멈춰야 한다. 그보다, 작품 스스로 다양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려는 새로운 시도들이 이루어져야 할 때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들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때, 오늘날의 예술이 그린버그의 교조적 미학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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