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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야기)[카라바지오, '의심하는 도마'] 의심하는 인간이야말로 자유로운 인간이다 본문

Humanities(인문)

(그림이야기)[카라바지오, '의심하는 도마'] 의심하는 인간이야말로 자유로운 인간이다

WBDJOON 2018. 11. 21. 11:06

의심하는 도마(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카라바지오,1602년, 유화, 107*146cm

대학 시절에 쓴 글을 편집해 올립니다. 


1601년에서 1602년 사이에 ‘의심하는 도마’를 그린 화가 카라바지오는 1571년에 태어나 39살의 짧은 인생을 이태리 반도에서 살았던 화가다. 본명은 ‘미켈란젤로’였으나, 그보다 더 유명한 르네상스 화가 미켈란젤로와 자신을 구분하기 위해 출신지인 카라바지오를 별명으로 썼고, 그렇게 그의 이름으로 굳어졌다.


그는 ‘돌+I’였다. 17세기 역사가들은 한결같이 그를 ‘극도로 이상한’ 인물로 묘사했다. 실제로 다혈질에, 폭력적이고 언행은 상스러웠고, 자유분방하며 수많은 범죄에 연루된 인물로 보인다. 그럼에도 야인과 자유인의 풍모도 강했던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창조는 돌연변이로부터 시작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실제로 그는 오늘날 미술사가들에게 르네상스 회화를 넘어서는 바로크 회화의 등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화가로 평가받는다. (그러니 주변에 있는 '또라이‘들을 조금은 관대하게 봐주도록 하자.)


 ‘의심하는 도마’는 이렇듯 뛰어난 화가이자 자유인(?)이었던 카라바지오의 화풍이 잘 들어나는 그림 이다. 그림 자체만으로도 여러 얘기를 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기도 하다. 구석구석 뜯어보면 카라바지오라는 자유인이 품고 있었던 혁신적인 사상과 영혼의 자유로움, 그만의 재기발랄함이 잔뜩 묻어있다.


그의 혁신적인 면모를 이해하려면 그가 살았던 시대의 그림들이 어떠했는지 조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언급했듯 카라바지오가 살았던 17세기 초 이탈리아는 유럽회화의 중심지로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이 그 틀을 완성한 ‘르네상스 회화’가 번성하고 있었다. 르네상스 회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다 빈치의 그림을 보면 르네상스 회화의 특징을 대표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 빈치가 그린 ‘수태고지’라는 그림은 천사 미카엘이 성모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했음을 알려주는 성경의 한 구절을 묘사한 성화(聖畵)다. 다 빈치는 원근법을 혁신적으로 적용한 인물이다. 배경을 자세히 보면 이 그림은 그림 가운데 한 점을 중심으로 정확한 비례를 적용해 원근법을 적용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다 빈치는 설계도를 그리듯 원근법을 계산해 이 그림에 적용했다. 


중세에 그려진 수태고지 성화를 보면 다 빈치의 수태고지가 어떤 혁신을 했는지 좀 더 체감할 수 있다. 미카엘과 성모마리아가 평면적으로 묘사되어 자세나 신체의 비율이 실제 사람과 비교하면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게 중세회화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반면 다 빈치의 그림 속 인물들은 신체 비례나 자세 등이 훨씬 사실적이다. 더 리얼하고 우아하게 그린다는 혁신을 다빈치가 이룩한 것이다.


카라바지오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던 대다분의 화가들은 다 빈치를 비롯한 ‘르네상스 3대 거장’들이 이미 미술을 완성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미술가의 소명은 그들의 미술을 계승할 따름"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카라바지오는 그렇게 믿지 않은 듯 하다. 절대적 권위를 가진 미술가들와는 다른, 새로운 시도를 한다. 그의 작품 ‘의심하는 도마’은 얼핏 보면 그저 종교적 소재를 다룬 성화로 보인다. 예수의 부활 직후 그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예수의 제자 도마가 예수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직접 확인하고 부활을 믿게 되었다는 요한복음의 한 구절을 묘사한 작품이다.

하지만 기존의 성화들과 분명히 다르고도 충격적인 것은 도마가 예수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 확인하는 모습을 직접 묘사했다는 점이다. 다 빈치는 중세회화를 벗어나 르네상스회화를 개척했지만, 성화 속 인물들을 성경 속 내용처럼 우아하고 신성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는 중세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카라바지오의 성화를 보면, 사실 우아함과 신성함보다는 오히려 극도의 사실감이 더 부각된다. 더 재미난 건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모습을 마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법한 일인냥 묘사한 것이다. 제자에게 상처에 손을 넣도록 허락하는 예수의 모습은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로 느껴진다.

종교의 권위가 여전히 하늘을 찌르던 이 시대에 감히 그 누가 신성한 예수의 상처에 손을 집어넣어 볼 상상을 했을까? 만약 당신이 이 시대에 사는 화가로서 이 장면을 그림으로 묘사해주길 부탁받았다면, 당신은 목을 걸고 이런 그림을 그릴 용기가 있는가? 


‘의심하는 도마’의 예수는 이렇듯 너무 현실적으로 묘사되어 권위적이지도 않고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자신의 상처에 누군가 손가락을 집어 넣었는데도 아무런 고통도 불쾌감도 느끼지 않는 무덤덤한 예수의 표정에서 오히려 극도의 신성함이 느껴진다.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한 예수의 담담한 반응이 그를 ‘우리 앞에 나타난 신’으로 재탄생하게 한다. 사진으로 찍은 듯한 카라바지오의 생생한 묘사력이 더해져서, 예수의 신성함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느낌도 든다.

'미치광이 화가'로 불리던 카라바지오가 생전에 성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계속해서 받은 것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 아니었을까. 예수와 예수의 신성함을 마치 눈앞에서 직접 보는 듯한 생생함으로 표현했기에, 그의 성화는 교회와 신도로부터 늘 환영받고 인기를 누렸으리라. 실제로 카라바지오는 여러 ‘비운의 천재’들과 달리 높은 유명세를 얻으면서 살았다. 


그의 천재성은 배경과 빛의 활용에서도 드러난다. 기존 회화들은 사실적 묘사와 빛의 효과에 무관심했었거나(중세), 야외를 배경에 두고 그 중심을 기준으로 한 원근법과 빛의 묘사에 초점을 맞추었다.(르네상스 시기).  그런데 카라바지오는 그림 속 인물들을 어두컴컴한 실내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림 속에 조그만한, 하지만 우리에겐 보이지는 않는 창(窓)을 내어 한 줄기 빛을 그림 속에 비춘다.

‘의심하는 도마’에서는 어두운 배경에 11시 방향으로 한 줄기 작은 빛이 들어온다. 어두운 배경과 작은 빛이 섞이자 그림에서 밝고 어두운 부분이 극적으로 대비된다. 환한 예수의 어깨와 대비되는 옆구리 상처의 어두움, 그림의 맨 위에 있는 제자의 빛나는 대머리와 어둠 속에 서있는 한 제자, 도마의 왼쪽 어깨와 팔이 밝게 드러난 것과 달리 그의 몸은 대체로 짙은 어둠에 놓여있는 모습에서 우리는 극적인 명암의 대비를 무의식적으로 체감한다.


이런 명암의 극적인 대비는 그림 속 인물의 입체감을 끌어올린다. 도마의 환한 왼쪽 어깨는 마치 그림을 뚫고 나오는 것과 같은 입체감을 준다. 그림 맨 위 제자의 빛나는 대머리는 예수의 옆에 서는 바람에 빛을 받지 못하는 한 제자와 대비되면서, 맨 위에 있는 인물이 우리와 가장 '멀리' 떨어져있다고 생생하게 느끼게 해준다. 어두움과 작은 빛을 활용해 명암의 대비를 극도로 추구해 입체감과 리얼리티를 업그레이드한 카라바지오의 구상은 천재적이라는 생각을 절로 든다. 사진과 명암대비에 익숙한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쩌면 당연해보일 수 있지만, 카라바지오가 등장하기 전 회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시도였다.


회화적인 측면에서도 감탄할 지점이 많지만 이 그림은 진정한 르네상스 정신을 담고 있다는 점이 가장 감탄스럽다. 르네상스는 신 중심의 중세로부터 탈피해 인간을 조명하고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인본주의(Humanism)와 근대성(Modernity)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예술의 르네상스를 가져온 다 빈치를 비롯한 르네상스 미술가은 여전히 성화를 그리고, 성화 속의 신들이 가진 신성함과 고귀함을 드러내는 것에 메여 있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중세적인 면이 있었다. 이는 여전히 바티칸 교황과 종교세력이 강력한 권력과 권위를 누리고 있던 시대였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카라바지오도 이런 제약에서 아주 자유롭지만은 않았다. 그도 현실감 있는 성화로 신의 성스러움을 부각시키는 작업을 했다는 점에서, 교황과 종교의 위세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았다. 성화로 큰 인기와 명성을 누렸다는 점에서도 그 당시 새로운 시대정신을 발휘한 인물이라고 말하기에는 난감한 점이 있다.

하지만 ‘의심하는 도마’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카라바지오가 어쩌면 도마를 통해 교회와 신이 누렸던 '중세적인 권위'를 무참히 끌어내리려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상상은 해볼 수 있다. 비록 성경에 나오는 장면이기는 하지만, 한 인간이 신의 부활을 의심하여 상처에 손까지 넣어보는 이 생생한 장면에서 우리는 ‘신을 의심하는 한 인간’을 보게 된다. '감히 손도 대지 못할 고귀한 존재로서의’ 신. 즉, 중세를 지배하던 그 고귀한 신은 적어도 이 그림 속에서는 사라진다. 그림에는 그저 지극히 인간적이기라서 오히려 더 신성한 신의 모습이 있을 따름이다.  교황과 주교를 거쳐야만 만날 수 있는 절대자가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지극히 인간적 존재가 바로 예수이고 신이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이 그림은 르네상스 회화고, 카라바지오는 휴머니스트라고 할만 하다. 어쩌면 카라바지오는 '의심하는 도마'를 신의 인간적인 면모와 신의 신성함이 모순되어 보이게 구성함으로써, 당대 교회와 종교의 권력과 위세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본주의의 메시지를 담으려 했던 게 아닐까. 시대정신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고 있지만, 현실의 권력과 권위는 여전히 종교가 압도하고 있었던 격동과 혼란의 시기에 한 예술가가 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기발한 구성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의심이라는 행위를 그림의 중심소재로 다루었다는 점도 그의 자유로운 영혼을 짐작하게 한다. 권력은 강제력으로 뒷받침되지만, 권위는 자발적인 복종으로 형성된다. 그래서 권위는 늘 믿음이 따른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늘 바람직하고, 정당하며, 뛰어나며, 그렇기에 절대적인 것으로 믿을 때 권위가 생겨나고 유지된다. 그런데 종종 권위는 권력과 합쳐지고, 사람들의 믿음은 예속과 맹종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늘 필요한 것은 바로 '의심'이다. 의심에서 출발한 비판과 견제가 부당한 권위를 깨트리는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바티칸 교황과 종교의 권위가 공고하던 그 당시 그림 속에서라도 예수라는 존재에 손가락까지 넣은 카라바지오는 권위에 주눅들지 않는 대범함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권위에 주눅들지 않는 자유로움이 바로 인간이 세상의 중심임을 외치게 되는 새로운 시대를 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르네상스에서 시작된 '근대(Modernity)'는 정말로 인간이 중심이 되고, 인간이 자유로운 시대인가? 오늘날 근대의 대표적 산물로 간주되는 자본주의와 시장, 국가와 민족은 중세의 종교와는 달리 권위적이지 않은가? 이들은 진정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가? 이런 질문에 '의심하는 도마'는 이렇게 답하는 듯 하다. "의심하라. 의심하기 때문에 인간이며, 의심할 때 비로소 인간은 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