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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서 발견된 16세기 난파선엔 왜 동판이 잔뜩 실렸나 본문

배준용(기자)의 기사 아카이브/World News(국제뉴스 2018. 6 ~ 2019)

북해서 발견된 16세기 난파선엔 왜 동판이 잔뜩 실렸나

WBDJOON 2019. 4. 11. 10:43

지난해 12월 31일 네덜란드 인근 북해를 지나던 파나마 국적 대형 화물선이 폭풍우를 만나 휘청거리면서 배에 실린 컨테이너 일부가 바다에 빠졌다. 수색팀이 출동해 사라진 컨테이너를 찾던 중 해저에 가라앉은 목조 난파선 한 척을 우연히 발견했다. 난파선 안에는 5t 분량의 동판(銅板)이 실려 있었다.

 

@뉴질랜드 문화유산청


네덜란드 문화유산청이 수개월간 조사 끝에 난파선과 동판의 정체를 밝혔다. 난파선은 1540년 무렵 건조된 배로 당대 유럽 최고 갑부이자 최초의 근대적 금융업자로 꼽히는 야코프 푸거(Jacob Fugger·1459~1525)의 가문이 고용한 네덜란드 선박이었다. 동판에는 푸거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 동판을 싣고 벨기에 앤트워프항으로 가던 중 침몰했다는 게 연구자들의 결론이었다.

 

16세기 유럽 최고 부호의 무역선에 수많은 동판이 실려 있었던 것에는 당시 유럽이 겪던 역사적 변화가 담겨 있다. 그리고 중심에 바로 야코프 푸거가 있다.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직물 무역을 하던 가문에서 태어난 푸거는 유년 시절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무역업과 경영을 배우고 가업을 물려받았다. 이후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에 있는 은광(銀鑛) 경영권을 확보하고 왕가와 영주, 주교들을 상대로 대부업을 벌여 부를 쌓았다. 특히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에 전쟁·통치 자금을 빌려준 대가로 헝가리 내 구리 광산을 독점 운영할 권리를 얻었는데, 이것이 푸거 가문이 유럽 구리 시장을 독점하는 기반이 됐다.

푸거 가문의 구리는 청동·총포 제작에 쓰였을 뿐 아니라 포르투갈 무역상들이 인도에서 후추를 사는 중요한 결제 수단이기도 됐다. 15세기까지 유럽은 베네치아 무역상을 통해서만 인도의 후추를 구할 수 있었다. 아라비아 상인들이 인도에서 후추를 구입해 육로로 레반트 지역(시리아·요르단·레바논 일대)까지 수송하면, 아랍 상인과 결탁한 베네치아 무역상들이 레반트 일대 항구에서 후추를 실어 지중해를 지나 유럽에 들여오는 식으로 막대한 돈을 벌었다.

포르투갈은 15세기 말부터 베네치아의 후추 무역 독점을 깨기 위한 신항로 개척에 나섰다. 1497년 포르투갈 탐험가 바스코 다가마가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에 도착한 이후 포르투갈 무역상들은 바닷길을 통해 인도 후추를 들여왔다. 그때 후추와 맞바꾼 게 푸거 가문의 은과 구리였다. 포르투갈 무역상들이 처음 인도에 도착해 유럽산 꿀과 모자를 내놓으며 후추와 맞바꾸자고 제안하자, 인도 상인들은 코웃음을 치며 "이런 시시한 것들 말고 금·은·동 같은 금속을 가져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푸거 가문은 후추 무역에 필요한 은과 구리를 공급하고 그 대가로 포르투갈 상선이 실어온 후추를 받아 독일과 동유럽 등에 되팔는 식으로 막대한 이득을 봤다. 한때 구리보다 더 많은 후추를 유럽에 유통해 푸거에게 '후추 자루'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푸거 가문은 헝가리 광산에서 난 구리를 앤트워프항이나 단치히(오늘날 폴란드 그단스크)항을 거쳐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수송했는데, 이번에 발견된 난파선은 그중 하나로 추정된다.

포르투갈과 푸거 가문이 합작한 후추 무역이 번창하면서 리스본은 수년 만에 유럽의 무역 중심지가 됐다. 이 여파로 중동과 지중해를 거쳐 비싼 값에 후추를 들여오던 베네치아 무역상들은 삽시간에 몰락했고, 1514년부터 베네치아는 리스본에서 후추를 수입하는 처지가 됐다. 이렇게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앞장선 대항해시대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