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WSJ 특파원의 베네수엘라 체험기 -5-
1장 베네수엘라 환전 전문가 '레오'
<3>
레오처럼 달러 암거래 사업을 하는 사람을 못마땅하게 보거나 사회의 큰 해악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 사망한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은 생전에 레오나 저자처럼 달러 암거래를 하는 사람들을 '달러 투기꾼'이라고 불렀다. 차베스의 혁명운동 '차비스타(Chavista)'는 "공공연히 달러를 암거래하는 것은 사회주의 혁명을 무너뜨리려는 경제 전쟁에서 이적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차베스가 집권한 지 4년이 지난 2003년, 정부를 상대로한 대규모 봉기가 이어지자 베네수엘라 정부는 달러 거래를 전면 금지시켰다. 당시 차베스에 봉기한 정적들은 주로 석유 산업 종사자들로, 강력한 권력을 쥔 차베스가 석유 산업 경영에 노골적으로 개입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전국적인 총파업을 조직해 차베스를 몰아내려 했다. 석유 시추 현장에 일하는 직원이나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직원들, 또 중역들까지 모두 사표를 내고 투쟁에 나섰다.
당시 국가총파업으로 베네수엘라 유전에서는 원유 생산이 완전히 멈췄다. 유조선들은 몇 주 동안 석유를 실을 수 없어 부두 근처 해상에 둥둥 떠있어야 했다. 에너지 공급이 완전히 차단되면서 베네수엘라 전역에서는 주유소 앞에 차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는 풍경이 벌어졌다. 베네수엘라의 핵심 수출품인 원유의 수출량은 거의 0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경제가 곧 완전히 붕괴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퍼졌고, 베네수엘라인들은 과거부터 여러 차례 겪은 경제 위기 상황에서 배운 교훈들을 하나둘 실천하기 시작했다. 달러화 같은 경화를 마구 구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볼리바르화 가치 하락으로부터 자신들의 자산 가치를 지키기 위한 생존 전략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자국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시민들의 경제 상황을 반드시 악화시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 경제는 특수한 면이 있다. 거의 모든 국민들이 생필품 등 일상적으로 필요한 제품을 대부분 수입한 제품으로 구입해서 써야한다. 특히 미국에서 생필품을 주로 수입하는 베네수엘라에서 볼리바르화 가치의 하락은 곧 음식부터 옷, TV, 냉장고, 세탁기, 휴대전화 등 일상적으로 필요한 거의 모든 제품의 가격이 더 비싸진다는 걸 뜻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달러를 많이 구하려 할수록 볼리바르화의 가치는 더욱 떨어지고, 결과적으로 베네수엘라 기업들이 의약품, 식료품 등을 수입할 때 갈수록 많은 비용이 들게 된다.
당시 베네수엘라의 상점, 슈퍼마켓, 쇼핑몰에서 판매되는 제품의 약 70%는 오롯이 수입품이었다. 의류와 신발은 대부분 미국에서 수입하고, 냉동닭들은 자메이카에서 수입되며, 쇠고기는 브라질에서 수입했다. 베네수엘라가 수입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면 베네수엘라 국민 대부분은 발가벗고 굶주린 상태가 된다. 이는 단지 베네수엘라가 석유 외에는 별다른 것을 거의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세상에 있는 거의 모든 상품을 소비하기를 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3년 베네수엘라 정부는 결국 달러 거래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도록 하는 고정환율제를 도입하는 법을 제정했다. 달러 가치가 더 이상 오르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실은 의도대로 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달러를 불법적으로 암거래하기 시작했고, 뒷골목과 호텔, 일반 가정, 까페 등 등에서 통용되는 비공식 환율, 즉 암시장 환율이 형성됐다.
달러의 유입과 유출을 차단하는 조치를 '자본통제'라고 하는데, 베네수엘라 정부는 당시 경제 위기를 넘기기 위해 6개월의 임시 대책으로 자본 통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2016년 현재에도 이 조치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차베스 지지자들은 베네수엘라가 생존하려면 이러한 규제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좌파 정치인들은 "달러화를 자유롭게 거래하도록 놔두는 것은 곧 국가 경제 전체에 대한 사보타주를 조장하는 것이며, 모든 생필품들이 엄청나게 비싸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은 레오나 나처럼 달러를 암거래하는 사람들이 아주 위험한 존재라고 간주한다.
이들 논리대로라면 베네수엘라에서 암거래에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은 곧 달러 투기꾼이 된다. 베네수엘라의 기업, 정치인, 의사, 변호사, 셰프, 택시 운전사는 물론 심지어 매춘부들도 여러 방식으로 달러화를 암거래하는 데 동참하고 있는 게 이곳의 진실이다. 이상적인 상황이라면 이들은 각자 자산이 맡은 업을 충실히 하면 되는 것이다. 의사는 환자를 돌보고, 변호사는 의뢰인을 잘 변호하면 된다. 하지만 이들은 달러를 암거래하기 위해 자신의 생업까지 포기하기도 한다. 이곳에서 달러 암거래로 얻는 인센티브가 아주 거대하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상품의 가격을 통제하면, 그 상품에 대한 수요가 더 늘어나 결국 이 상품의 전체 유통량은 희소해질 가능성이 커진다. 달러 역시 예외가 아니다. 베네수엘라 정부의 달러 관리는 결코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기아가 심한 아프리카 지역에서 여러 사람들이 자원 봉사자들이 가져온 구호 식료품을 받으려 뒤엉키는 광경을 TV로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베네수엘라의 달러 암거래 시장에서 환율이 미친듯이 치솟는 광경과 비슷하다. 둘 모두 광적인 수요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2015년 5월 말 기준으로 베네수엘라 암시장에서 통용되는 환율은 1달러당 400볼리바르였는데, 이는 단 4개월만에 120% 오른 것이다. 이 환율을 기준으로 따져보면 2015년 1월에까지는 베네수엘라에서 액면 단위가 가장 큰 100볼리바르 지폐 한 장이 55센트의 가치가 있었는데, 4개월만에 이 가치가 반토막났다는 걸 뜻한다.
이 책의 편집자와 내가 이 글의 내용을 다시 점검하기 위해 2016년 3월 베네수엘라를 방문했을 때에는 암시장 환율이 1달러당 거의 1200볼리바르에 달했다. 100볼리바르가 겨우 8센트의 가치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아마도 당신이 이 책을 구입해서 읽을 때 쯤이면 볼리바르는 사실상 가치가 완전히 소멸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정상적이라면 베네수엘라에서는 달러화가 부족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최근 몇년 간 베네수엘라 정부는 해마다 약 1000억달러를 석유 수출로 벌어들였다. 현재 달러화 가치로 환산해보면 이 돈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유럽의 경제 재건을 위한 '마셜 플랜'에 쏟아부었던 예산과 비슷하다.
차베스가 집권해 2014년까지 권좌를 지키는 동안 베네수엘라 국영기업 PDVSA(Pertoleos de Venezuela)는 석유 수출로 약 1조3600억달러를 벌었는데, 이는 마셜플랜으로 지출한 예산보다 약 13배 많은 액수다. 베네수엘라가 너무나 많은 석유 수입을 벌어들인 탓에 GDP의 약 60%가 석유 수출로 번 돈이었는데, 영국 바클레이 은행은 2014년에만 이 돈이 1810억달러라고 추산했다. 당연히 베네수엘라는 석유 수입을 벌어들인 만큼 달러화도 많이 벌어들였다.
베네수엘라의 원유매장량은 2990억 배럴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다.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더 많은 원유가 매장되어 있다. 하지만 2016년에 베네수엘라는 석유 분야에 재투자를 충분히 할 달러화를 갖고 있지 못했다. 심지어 우유, 닭고기, 쇠고기, 휴대전화, 폴리에스테르, 화장지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들을 수입할 달러조차 충분치 않았다. 당시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는 2016년 3월 중순 기준으로 135억 달러로, 지난 7년 중 가장 낮은 수준을 보였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