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정부, 활개치는 무정부주의자 폭력 일부러 방조?
그리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에서 약 10여분 거리에 있는 익사키아(Exarchia) 지역은 고즈넉한 그리스 전통 식당과 주점이 모여 있는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거리다. 하지만 주말 밤만 되면 이곳은 무정부주의자들이 던진 화염병과 경찰이 쏜 최루탄이 범벅된다. 익사키아 주민들은 “주말만 되면 무정부주의자들이 소동을 벌인 탓에 고통스럽다”며 “치안 불안을 해결해달라고 수 차례 호소했지만 정부가 번번히 묵살한다”고 말한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아테네에 무정부의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지만 그리스 정부가 사실상 이를 방조하고 있다”고 9일 보도했다. 급진 좌파 시리자가 주축이된 치프라스 정권이 떨어진 인기를 회복하기 위해 급진 좌파와 친밀한 무정부주의자들의 폭력을 일부러 방조하고 있다는 얘기가 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의 무정부주의(Anarchism·아나키즘)는 뿌리가 깊다. 19세기 초 무정부주의가 태동할 때부터 그리스 지식인 상당수가 아니키즘에 동조했고, 19세기 후반부터 아테네를 중심으로 무정부주의자들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의 그리스 침공에 맞섰고, 1970년대 군부 독재 정권에 거세게 저항한 역사가 있다. 2008년 정치권의 부패와 방만한 재정 운영으로 그리스 경제가 파탄나면서 일어난 대규모 반정부 시위에서도 무정부주의자들이 대거 앞장섰다.
현재 아테네에서는 익사키아를 비롯해 가레(Gare), 자이미(Zaimi), 코우카키(Koukaki) 지역 등에 무수한 무정부주의 단체가 활동 중인데, 최근에는 루비코나스(Rouvikonas)라는 정체 불명의 무정부주의 단체가 아테네 주재 외국 대사관과 정부 청사 건물, 외국 기업이 입주한 빌딩 등 공격하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현지 언론 ‘그릭 리포터(Greek Reporter)에 따르면 이달 3일에는 9명의 루비코나스 대원이 아테네 주재 아르헨티나 대사관에 무단 침입해 소동을 벌이다 2명이 체포됐고, 지난 9월에도 루비코나스 대원 10여명이 오토바이를 타고 이란 대사관에 나타나 경비 초소의 유리를 깨트리고 유리병을 창문에 투척하고 달아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지난 몇 달간 아테네 주재 터키·프랑스·오스트리아 대사관이 루비코나스의 습격을 받았다. 지난달 아테네에 한 경찰서는 여러 무정부주의단체의 대원으로 추정되는 50여명의 습격을 받아 경찰관 4명이 다치고 경찰차량 8대가 파손되기도 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상한 점은 이런 폭력 행위를 저지른 루비코나스 대원이 체포되는 일이 극히 드물고, 설령 붙잡혀도 곧장 풀려난다는 점”이라고 했다. 가령 지난해 그리스 의회에 건물에 무단 침입한 루비코나스 대원들이 경찰에 체포됐는데, 그리스 정부는 “그들은 시위참가자로서 과격한 행동을 했을 뿐”이라는 발표와 함께 이들을 곧장 석방했다. 이외에도 폭력 행위에 가담한 루비코나스 대원들이 체포될 때마다 그리스 검찰은 ‘혐의가 너무 미약하다’며 이들을 풀어주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급진 좌파 연합 ‘시리자’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정권이 일부러 무정부주의자들의 폭력을 방조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현재 그리스 여론은 치프라스 정권의 엄격한 긴축 정책이 이어지면서 긴축에 부정적인 좌파 성향의 시민들을 중심으로 불만이 계속해서 고조되고 있다. 지난 7월 80여명의 사망자를 낸 아테네 대형 산불도 “치프라스 정권의 무능이 드러났다”는 비난을 불렀다. 현지 정치 평론가들은 “치프라스 정권이 무정부주의자들의 폭력을 용인하는 방식으로 ‘급진 좌파’라는 본래의 이념성을 부각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이코노미스트는 “그리스 정부의 방조 속에 무정부주의 단체들이 젊은 극단주의자 양성소로 발전하는 양상”이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