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준용(기자)의 기사 아카이브/정책부(2020년 1월 ~)

정부가 추진하는 직무급제란? 쏟아지는 비판 이유는?

WBDJOON 2020. 1. 19. 16:51

'고용 안정'을 강조하며 그간 노동 개혁을 주저했던 문재인 정부가 이달 '직무급' 임금체계 확대 카드를 꺼내 들었다. 급속한 인구 고령화와 근속 연수에 따라 임금이 무조건 오르는 호봉제가 맞물려 기업의 인건비 부담이 폭증하고 청년 채용 확대가 어려워지자 결국 호봉제를 대체할 직무급을 공공기관에 이어 민간에도 확산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지난 20년간 한국 사회에 자리 잡지 못한 직무급제를 노동시장 양극화의 해법으로 꺼내 든 건 의아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현 정권이 현실성 없는 직무급제를 내세워 노동개혁 '시늉'을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온라인 상에서는 "호봉급이 가장 뚜렷한 공무원부터 직무급제를 도입하고서 민간에 하라"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임금격차, 노동시장 양극화 해법으로 '직무급' 꺼낸 정부

직급제를 기반으로 하는 호봉제는 사원보다 대리, 대리보다 과장이 더 높은 기본급을 받는 구조다. 반면 직무급은 사원, 대리 등 낮은 직급이라도 능력을 인정받아 업무 강도와 난도가 높은 직무를 맡으면 근속 연수와 직급과 무관하게 더 높은 기본급을 주는 방식이다. 가령 은행에서 근무하는 대리가 능력을 인정받아 지점장으로 승진하면 대리가 받는 기본급이 아닌 지점장이 받는 기본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 대기업 및 중견기업들 상당수는 여전히 호봉제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100인 이상 사업체 중 약 58.7%가 호봉급을 두고 있다. 반면 2015년 기준으로 실질적인 직무급을 도입한 국내 기업은 5% 내외로 추산된다. 그 외 성과연봉제를 도입한 기업들도 사실상 근속수당, 직급수당 등으로 호봉제와 유사한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초부터 간혹 언급했던 직무급제 확대를 올해부터 본격화했다. 앞서 기획재정부가 올해부터 공공기관에 직무급을 전면 도입하기로 한 데 이어 13일 고용노동부도 이를 민간 기업에도 확대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고용부는 "정부는 직무급 도입을 각 기업의 노사 자율에 맡기되, 직무급 도입 매뉴얼을 기업 8000여곳에 배포하고 올해부터 희망 기업 16곳을 대상으로 직무급 도입을 위한 무료 컨설팅을 시범 실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경사노위에서 직무급 확대를 위한 협의 노동계, 경영계와 해나갈 방침이다.

◇노동계 "정부 가이드라인" 반발

앞서 직무급제 도입을 전면 반대했던 양대 노총은 이날 고용부의 직무급 확대 방침이 공개되자 당장 반발했다. 호봉제와 같은 연공급(근속년수에 따라 오르는 급여)은 노동시장 양극화의 근본 원인이 아니라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한국노총은 이날 성명을 내고 "노동시장 양극화의 근본 원인은 임금체계의 연공급이 아닌 재벌·대기업의 불공정 거래에 있다"며 "(직무급 도입은) 오히려 기업 주도의 임금 삭감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 밝혔다. 민주노총도 "임금체계는 노사가 협상을 통해 개선 방안을 마련해야 하는 게 상식인데 정부가 일방적으로 임금체계 개편을 강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최근 문성현 경사노위 위원장 역시 정부가 경사노위 대화를 거치지 않고 직무급 도입을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은 사실상 사회적 대화를 무시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기업들도 난감하다는 입장이다. 이전 정권이 직무급제 같은 취지로 도입한 성과연봉제를 문재인 정부는 노동계의 반발에 밀려 뒤집었다. 그런데 다시 난제인 직무급 도입을 꺼내 들자 "공공부문에선 성과도 못 내면서 민간에서 밀어붙이려고 하느냐"는 반응도 나온다. 한 기업 관계자는 "노조 반발에 임금피크제 도입도 어려운데 그보다 파장이 몇 배 큰 직무급 도입이 잘될 리 만무하다"고 말했다. 

이런 기류 때문인지 이날 정부는 직무급 임금체계 개편의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하지 않고 노사 자율성을 강조하는 등 사실상 중장기 과제로 내놨다. 재계 관계자는 "공공기관의 직무급제 도입이 미진하고 노조 반발이 뻔한데 정부가 뒷짐을 지고 있으면 민간 차원의 직무급 확대가 속도를 낼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경총 관계자는 "현행 법·제도상 직무급제는 노조 동의가 없으면 도입이 불가능한데 과연 현실성을 염두에 두고 이런 발표를 한 건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직무급에 반대하는 강성 노조가 존재하는 한 직무급 도입을 위한 취업규칙 개정이나 단체협약 개정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직무급 도입은 '산 넘어 산'

노조 반발 외에도 직무급 도입을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당장 기업 내 여러 직무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지가 문제다. 이 과정에서 사내 분란이 발생할 수도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대기업들이 일반적으로 직무급 도입을 원칙적으로 선호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공채 문화가 강한 국내 기업문화의 특징상 여러 직무가 다른 가치로 평가될 경우 사내에 극심한 분란이 일어날 수 있어 직무급 도입을 꺼릴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정한 직무가 고평가 되고 다른 직무가 저평가 되면 직군 간 근로자 간에 갈등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노사관계 전문가는 "공채 문화와 순환 보직 개념이 고착되어 있는 문화에서 직무급제 도입은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라며 "노동 유연성이 확보되고 능력에 따른 보상과 이직이 자유로운 채용, 기업문화가 형성되지 않으면 직무급제 도입은 요원하다"고 지적했다. 4년 이상의 준비 기간을 거쳐 올해부터 직무급을 도입한 교보생명도 완전한 직무급이 아니라 기존 연봉제의 기본급 중 5~10%를 직무급으로 책정하는 방식이다.

익명을 요구한 또다른 노사관계 전문가는 "현 정권이 직무급제 도입으로 노동개혁 시늉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가 '노동개혁 의지가 없다'는 비판을 면하기 위해 현실성 낮은 직무급제 도입을 민간에 던져놓은 모양새라는 거다. 직무급제 자체가 대부분 직무에 따른 성과 평가와 이에 따른 차등 보상을 전제하고 있는데, 노동유연성이 빠진 직무급제 도입은 직무급제의 원 취지와도 부합하지 않다고도 지적했다. 고용부는 올해 민간 기업에 직무급 도입 무료 컨설팅을 지원하는 사업에 예산 4억원을 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