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준용(기자)의 기사 아카이브/Hidden News(숨겨놓은 국제뉴스)

정치 분열·사회 불안정에 염증 느낀 전 세계 부자들, 포르투갈로 이민간다

WBDJOON 2019. 8. 13. 17:39

미국에서 멕시코 출신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살던 영국인 민간 파일럿 앤디 야쿱씨는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자 미국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가족과 함께 포르투갈로 이주했다. 처음에는 영국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가 그의 발길을 막았다. 다음 후보지로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찾았지만, 길거리 여기저기에 '관광객은 제발 집으로 돌아가라'는 그래피티가 그려진 것을 보고 포르투갈을 택했다.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과 유명 휴양지 알가르베 지역에서 호텔·리조트 사업을 하는 영국인 사업가 스턴씨는 “포르투갈 사람들은 다른 종교, 정치적 신념, 인종과 무관하게 늘 친절하고 개방적이라 어디 가나 환영받는 느낌”이라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말했다.


브라질 상파울루 출신 사업가 에두아르도 미글리오렐리씨는 최근 포르투갈을 여행하고 나서 곧장 가족과 함께 포르투갈로 완전히 이주했다. 여행 당시 호텔에서 수백미터 떨어진 식당까지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다는 게 미글리오렐리씨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상파울루에서는 그렇게 다니다간 단번에 도둑을 만나 돈을 빼앗긴다. 포르투갈에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니지 않아도 된다”고 FT에 말했다. 포르투갈은 EU 국가 중에서 범죄율이 가장 낮아 브라질 재력가들에겐 치안도 좋고 언어도 같은 포르투갈이 이민지로는 최적지로 꼽힌다. 

한국을 방문했던 포르투갈 축구선수 크리스티아노 호날두는 팬들에게 불친절한 인상을 남기고 떠났지만, 다른 포르투갈 국민들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FT는 지난 8일(현지 시각) "정치가 안정되고 관대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갖춘 포르투갈이 전 세계 이주민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전 세계적으로 포퓰리즘과 국수주의, 인종차별 등으로 인한 극단적인 정치 분열과 혐오 범죄가 곳곳에서 벌어지자 여기에 환멸을 느낀 사업가나 전문직 종사자들이 외국인에게 관대하고 정치·사회가 안정된 포르투갈로 대거 이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포르투갈 정부 통계에 따르면 2008년 포르투갈 내 외국인 거주민 수는 9만3000명에 불과했는데, 지난해에는 외국인 거주민 수가 48만명을 기록했다. 10년 만에 5배 이상으로 늘어난 것이다. 

소매치기가 많고 지역 갈등이 심한 이웃나라 스페인과 달리 포르투갈은 국내외 분쟁이 적고 치안 수준도 높다. 국제경제평화연구소가 국가별 사회 안전망, 국내외 분쟁, 군사화 수준, 치안 수준을 매년 평가하는 ‘국제평화지수’에서 포르투갈은 올해 2단계 상승한 3위를 기록했다. 1위는 아이슬란드, 2위는 뉴질랜드였다. 분단국가에 군사화 수준이 높은 한국은 지난해보다 9단계 하락한 55위였다. 세계 최대 군사강국인 동시에 연이어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지는 미국은 최하위권인 128위에 그쳤다. 

전문직 종사자와 부유한 사업가들에게 각종 세금 혜택과 비자를 쉽게 발급하는 포르투갈 정부의 정책도 이주민을 끌어들이는 요인이다. 포르투갈은 2012년부터 외국인 이주민이 50만유로(6억 8000만원) 이상의 부동산을 구매하거나 이에 준하는 직접 투자를 하면 장기 체류 비자를 발급하는 ‘골든 비자’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수도 리스본의 경우 올해 초 기준으로 도심 지역 아파트는 한 평당 평균 1만1600유로(1570만원), 외곽 지역 아파트는 한 평당 평균 6600유로(895만원) 정도다. 이 제도로만 지난해까지 총 30억유로(4조 625억원)의 외국인 투자를 유치했다. 

포르투갈이 EU 국가에서 이주한 사람에게 연금소득에 대해 면세혜택을 부여하면서 유럽 내 고령 연금 생활자들도 대거 포르투갈로 이주하는 추세다. 핀란드에서는 이게 큰 사회 문제로 떠오르면서 핀란드 정부가 포르투갈과 체결했던 이중과세방지조약을 올해 초 파기했다. 

포르투갈이 적극적으로 이민 유치에 나선 건 2008년 국제 금융 위기의 영향으로 극심한 재정 위기와 경제 침체를 겪었기 때문이다.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4%로 떨어지고 실업률은 17%까지 치솟자 정부는 주력 산업인 관광업을 살리고 외국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관대한 이주 제도를 속속 도입했는데, 이게 톡톡히 효과를 내는 모양새다. 포르투갈은 경제 성장률이 지난해 2.8%를 기록했고, 올해는 약 40여년 만에 정부가 균형재정을 달성할 전망이다. 실업률도 6.7%까지 떨어졌다.

현재 포르투갈 경제는 이민이 늘면서 투자가 늘고, 경제가 좋아지자 투자 이민이 더 늘어나는 선순환이 형성됐다. 포르투갈이 지난해 유치한 외국인 직접 투자액(그린필드 FDI)은 32억 5000만유로(4조4000억원)인데, 이는 3년 전보다 무려 161% 증가한 수치로 유럽 내에서도 가장 높은 증가세를 보였다. FT는 “투자자·사업가들에게 이제 정치적 안정과 사회적 평화가 이주·투자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분석했다. 

물론 부작용이 없진 않다. 리스본과 포르투, 알가르베 지역에서는 외국인의 부동산 투자가 급증하고 호텔·관광시설이 늘어나면서 원 거주민들이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는 추세다. 관광객과 이주민이 더 늘면 ‘오버투어리즘’이 심각해질 거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